전기차 시대, 철강 합금의 새로운 쓰임새
전기차의 등장은 자동차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내연기관차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엔진과 연료 효율이었다면, 전기차에서는 배터리 성능과 경량화, 안전성이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많은 사람들은 전기차가 ‘알루미늄과 탄소 복합재의 시대’를 열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가벼운 소재의 수요는 급격히 증가하고 있으며, 알루미늄 합금이나 복합 소재가 주목받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철강 합금은 전기차 산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역이다.
철강은 단순히 무겁다는 이미지 때문에 전기차 시대와 맞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최신 철강 합금 기술은 과거와는 차원이 다르다. 초고장력 강판, 전기강판, 특수 표면처리강 등은 전기차의 안전성과 성능을 동시에 뒷받침한다. 차체 충돌 안전성을 보장하면서도 무게를 최소화하고, 고전압 배터리를 보호하며, 전기 모터의 효율을 극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전기차 시대는 오히려 철강 합금이 진화해 새로운 쓰임새를 발휘하는 무대라고 할 수 있다. 이번 글에서는 전기차 산업 속에서 철강 합금이 어떤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가능성이 열려 있는지를 살펴본다.
철강 합금의 초고장력 강판으로 구현하는 경량화와 안전성
전기차는 배터리 무게 때문에 내연기관차보다 기본적으로 더 무겁다. 배터리 팩만 해도 수백 킬로그램에 달하기 때문에, 차체는 이를 상쇄할 만큼 가볍게 설계되어야 한다. 하지만 단순히 차체를 가볍게 만들면 충돌 시 탑승객을 보호하지 못한다. 이러한 모순된 요구를 해결하는 소재가 바로 초고장력 강판이다. 초고장력 강판은 인장 강도가 1,000MPa 이상으로, 일반 강판의 두께 절반 이하로도 동일한 안전 성능을 구현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차체 무게는 줄이면서도 충돌 흡수 능력은 유지할 수 있다.
실제로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차체 골격의 핵심 부분, 예를 들어 A필러와 B필러, 사이드 레일, 루프 레일에 초고장력 강판을 적용한다. 테슬라와 폭스바겐은 전기차 플랫폼에서 초고장력 강판 비중을 점차 늘리고 있으며, 현대자동차 역시 전용 전기차(E-GMP) 플랫폼에 대량 적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핫스탬핑(Hot Stamping) 기술이 도입되어, 가열된 강판을 금형에 넣고 동시에 성형과 담금질을 진행해 복잡한 형상에서도 높은 강도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기술 발전은 철강 합금이 여전히 차체 안전성 확보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배터리 보호와 열 관리에 쓰이는 특수 합금강
전기차의 배터리는 고전압을 다루며, 충격과 화재에 특히 취약하다. 따라서 배터리를 보호하는 케이스와 하우징은 단순한 외피가 아니라 차량 안전의 핵심 부품이다. 고강도 합금강은 외부 충격으로부터 배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뿐 아니라, 만일 화재가 발생했을 때 불길이 다른 영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지연시키는 역할도 한다. 전기차 화재 사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탑승자가 대피할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에, 합금강 하우징의 역할은 단순한 구조적 보호를 넘어 안전 확보의 최후 방어선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일부 합금강은 열전도율이 높아 배터리 발열을 효과적으로 분산시킨다. 배터리 셀은 충·방전 과정에서 상당한 열을 발생시키는데, 이를 제때 식히지 않으면 성능 저하와 수명 단축, 심할 경우 화재 위험으로 이어진다. 특수 합금강은 열을 빠르게 분산시켜 배터리 팩의 온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도록 돕는다. 최근에는 난연 코팅을 더한 합금강이나, 내부식성이 강화된 특수 강재가 배터리 케이스 소재로 주목받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등 글로벌 배터리 기업들도 철강 업체와 협력해 이러한 신소재 개발에 나서고 있으며, 이는 전기차 안전 경쟁에서 중요한 차별화 포인트가 되고 있다.
전기 모터와 구동계 성능을 높이는 전기강판
전기차 모터는 연료를 폭발시켜 동력을 얻는 내연기관과 달리, 전류와 자기장을 활용해 회전력을 발생시킨다. 이때 효율을 결정하는 핵심 소재가 바로 전기강판이다. 전기강판은 규소가 첨가된 합금강으로, 자기적 손실을 줄이고 자속 밀도를 높이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고급 전기강판은 히스테리시스 손실과 와전류 손실을 최소화하여 모터의 에너지 효율을 크게 향상시킨다.
전기차에서 모터 효율은 곧 주행거리와 직결된다. 동일한 배터리 용량이라도 전기강판 품질이 좋으면 손실이 줄어들어 더 멀리 주행할 수 있다. 때문에 글로벌 철강사들은 초저손실 전기강판을 앞다투어 개발 중이다. 일본의 JFE스틸, 한국의 포스코, 중국의 바오스틸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0.25mm 이하의 얇은 전기강판을 양산하며, 미세 코팅 기술을 통해 절연성과 내식성까지 강화하고 있다. 또한 하이브리드카와 달리 순수 전기차에서는 더 높은 주파수 특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에 맞춘 신형 전기강판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철강 합금이 전기차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모터 효율에 직접 관여하고 있는 셈이다.
지속 가능성과 재활용 측면에서의 경쟁력
전기차 산업이 성장하는 배경에는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 탄소중립이라는 전 세계적인 목표가 자리하고 있다. 철강 합금은 이 점에서 강력한 경쟁력을 지닌다. 무엇보다 철강은 100% 재활용이 가능하고, 재활용 과정에서도 성능 저하가 거의 없다. 이는 알루미늄이나 복합 소재와 비교했을 때 큰 장점이다. 알루미늄은 재활용 시 에너지 소모가 크고, 복합 소재는 분리·재활용이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철강 업계는 기존의 고탄소 배출 공정을 대체하기 위해 수소환원 제철 기술과 탄소 포집·저장 기술(CCUS)을 도입하고 있다. 포스코와 아르셀로미탈 같은 글로벌 철강 기업들은 이미 수소 기반 제철 공정을 시험 단계에서 상용화 단계로 확장하고 있으며, 이는 전기차 산업의 친환경적 이미지와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전기차 제조사 입장에서도 재활용성이 높고, 친환경 제철 공정으로 생산된 철강 합금을 사용하는 것은 브랜드 가치와 직결된다. 따라서 철강 합금은 단순한 소재를 넘어, 지속 가능한 모빌리티 시대를 열어가는 핵심 자원으로 자리 잡고 있다.
결론
전기차 시대는 소재의 선택에 있어 새로운 기준을 요구한다. 무게를 줄여 주행거리를 늘려야 하고, 충격과 화재로부터 배터리를 보호해야 하며, 전기 모터의 효율을 극대화해야 한다.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철강 합금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초고장력 강판은 경량화와 안전성을 동시에 달성하며, 합금강 기반 배터리 하우징은 충격과 열로부터 전기차를 지켜준다. 또한 고성능 전기강판은 전기 모터의 효율을 높여 전기차 주행거리를 결정짓는 요소가 된다.
많은 이들이 전기차 시대를 알루미늄이나 탄소복합재의 전성기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철강 합금이 진화해 전기차의 핵심 소재로 자리 잡고 있다. 더 나아가 철강은 재활용성이 뛰어나고, 수소 제철과 같은 친환경 공정이 가속화되고 있어 미래 친환경 모빌리티 산업에도 적합한 소재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전기차가 보편화될수록 철강 합금은 단순히 ‘과거의 소재’가 아니라, 새로운 기술 요구에 맞춰 진화하는 미래형 소재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